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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발의 마음
Day+000 @인천공항 제2터미널 대한항공 라운지.
이제 10분만 있으면 시애틀로 떠난다. 어쨌든 남겨두고 가야할 기분은 여기에 남겨두고 떠나야 할 것 같아서 가만히 앉아 되돌아본다.
되돌아본다면
어쨌든 지난 몇 년 동안은 운이 좋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다. 선생님과 나는 여러 모로 잘 맞는 편이었다. 굉장한 행운이 따랐던 것은 선생님과 내가 달라서 잘 맞았다는 점이다. 선생님과 나는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총체적으로 다른 인간이었다. 어쩌면 방향이 돌고돌아 비슷했는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은 그걸 “너랑 나는, 보는 관점이 한 7도 다른 거 같”다고 표현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더니
여튼 쉽게 말해서 나는 안해도 될 걱정까지 하는 사람이었고, 선생님은 해야 될 걱정도 안 하는 분이었다. 선생님은 이상주의의 끝을 달렸고, 나는 언제나 지독하게 현실적이었다. 대부분의 결과에 대해 낙관하는 선생님과 달리, 나는 언제나 최악의 상황을 염두에 두고 모든 일을 했다. 그리고 사실 그런 점들은 나의 약점이기도 했다.
새로운 것, 모르는 것, 익숙하지 않은 것, 그래서 처음부터 잘해내기 어려운 것. 나는 모험을 즐기지않는다. 현실적인 장벽을 먼저 가늠하고, 두려운 것에 맞서는 용기가 부족한 편인데, 다행스럽게 모험가인 선생님은 나의 등을 떠밀어 스스로 나가도록 했다. 지난 6월에 선생님과 나의 대화를 생각해보자면. “넌 미국에 정말 안 갈거니?” “아뇨 저도 가고는 싶은데요. 마음에 여유가 없어요. 일도 너무 많고…” 그리고 그 한마디가 지금에 이르렀다. “그럼 내가 널 위해서 뭘 해주면 되니?” 나는 말문이 막혔다. 그래서 아무말이나 했다. “그러면 저 건강지킴이 프로젝트 외에 다른 일 안하게 해주세요” 그리고 선생님은 거짓말같이 랩미팅 운영, 랩장 일들에서 나를 빼주었다. 그리고 나는 그 어떤 핑계도 나에게 남아있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냥 모든 것이 나의 마음의 문제임을 인정했다. 그러는 데 거의 3개월이 걸렸다. 그리고 그 후에 사실상 미국에 가네 마네 하면서 일이 진행되는 데는 한 달도 채 걸리지 않았다.
석사 마지막 학기가 시작되기 직전 겨울 방학에 선생님과 나는 가로수길 지구당에서 규동을 먹으며 몇 가지를 얘기했다. 선생님은 융대원을 “유학을 가지 않아도 되는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지만, 단 하나 융대원이 줄 수 없는 게 “cross-cultural한 perspective”라고 했다. 그리고 그때 이야기하기를, 내가 박사를 시작하면 그런 기회들을 많이 만들어줄 수 있다고 했다. 그때는 그냥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지금, 결국에 선생님 도움으로 시애틀에서 1년간 지내면서 말마따나 다양한 문화적 경험을 할 기회를 받았다. 선생님은 보통 지나간 것은 쉽게 잊어버리시니까 지구당에서의 이야기를 당연히 기억하진 못하겠지만 (어쨌든 내가 기억하고 있으니) 선생님은 약속 아닌 약속을 지킨 셈이다.
끝과 시작
3년의 끝이 믿긴다면 거짓말
어제부로 건강지킴이 프로젝트도 완전히, 진짜 끝이 났다. 거짓말 같다. 23일에 출국인데, 22일에 최종발표를 하게 되다니 그것도 참으로 드라마틱한 마무리인 셈이다.
끝까지 일할 팔자
나는 석사 프로포절 후 하루를 쉬고, 그 다음날부터 건강지킴이 프로젝트 제안을 시작했다. 그렇게 3년간 하나의 프로젝트를 이끌었다. 지난 11월 8일에 날짜로 종료, 12월 말에 보고서를 내면서 또 종료하는 느낌… 그렇게 끝날 듯 안 끝나서 실감이 안났는데. 그리고 어제부로 최종발표하며 정말로 끝. 어떤 마음인지 잘 모르겠다. 그냥 이렇게 정리되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그래도 데이터는 남았으니 논문은 1편 정도는 더 쓸 수 있겠지, 라는 생각 정도? 그리고 정말 끝났으니, 시원하게 새로 시작할 수 있겠다는 정도?
3년의 축약 = 세 권의 책
모험과 도전과 용기
어쨌든 나는 이제 UW에서 1년간 방문연구원이라는 다소 애매한 신분(선생님으 자꾸 pre-doc이라고 하신다)으로 지낼 예정이다. 사실 이제 박사 3년차니까 차라리 박사 빨리 끝내고 포닥으로 갈 수도 있지 않느냐… 이런 이야기도 많이 들었는데, 그건 좀 어렵지 않나, 라고 생각해본다. 만약 어찌저찌 막 우겨서 졸업한다면 졸업을 할 수 있을지도 모르지만(?), 준비가 덜 된 채로 무작정 또 졸업하면 뭐할까? 어쨌든 우리 연구실에서는 “준비가 되지 않으면 나갈 수 없다”라는 것이 중요하고 나도 동의를 한다. 나는 아직 준비되지 않았다.
사실 박사과정이 끝난 것도 아닌데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우습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건 어떤 반환점이 될 것이므로, 지금의 기억을 남겨놓는다. 4년하고도 6개월 전, 처음으로 유엑스랩에 발을 딛은 그때와 지금의 내가 너무도 다르듯이, 지금의 나와 몇 년 후의 나는 또 다를테니.
어쨌든 내게는 이번 1년은 모험이 될 것이다. 용기를 내어 한 걸음 내딛지 않으면 새로운 세상으로 절대 나아갈 수 없다. 이제 내가 못하는 것 투성이인, 모든 것이 새로운 곳으로 1년간 떠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