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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곳으로의 도착
Day+001 @시애틀의 어떤 에어비앤비.
정신없는 출발
라운지에서 여러 교수님들께 서둘러 메일을 보냈다. 주된 내용은 UW에 가서 1년간 연구하다 돌아돌 계획이며, 나의 마음과 각오에 대한 것이었다. 각 선생님들과 언제 마지막으로 뵈었었는지 되새기며 메일을 쓰다보니 라운지에서의 2시간은 정말 금방 지나갔다.
단호박 스프와 정체 불명(?)의 음식이었으나 맛은 좋았다
비행기가 30분 연착되어서 겨우 시간 맞춰 짐을 챙겨 나왔다. 비행은 원래 9시간 40분이라고 들었는데, 웬일인지 기내 방송에서는 9시간 6분이라고 들었던 것 같다. 쨌든 비행은 평온하게. 비빔밥을 먹었는데, 스테이크를 먹을 걸 그랬다고 나중에서야 약간 후회했다.
밥먹으며 아이캔스피크를 보고, 블레이드러너2049를 보다가 잠이 들었다. 자고 일어나니 아침(?)이 되었고, 1시간 후에 도착한다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아시아에서 가장 가까운 미주 본토의 도시라고 했는데 정말 금방이다. 많이 멀어진 느낌이 나지 않았다.
도착했을 때의 시애틀은 무척 흐렸다. 해가 잘 안나서 우울증에 걸린다더니…
한국에서 23일 저녁 7시에 출발했기 때문에 17시간의 시차가 있는 시애틀은 23일 오전 11시였다. 어쩐지 그런 것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어쨌든 나는 그때부터는 혼자였다. 여행자의 들뜸보다는 어쩐지 차분하고도 비장한 마음이 더 컸다.
정신없는 도착
시애틀 타코마 공항
여기서부터는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라고 생각했지만. 공항에는 한국 사람들이 비교적 많았고, 출입국 심사 안내 직원은 심지어 한국인이었다. “ESTA 두 번째로 오신 분은 2번, 아니면 1번으로 가세요” 라고 정말 똑똑히 울리는 한국어를 듣고 있자니 뭔가 낯설음이 반감됐다. 게다가 CHI 때문에 작년에 덴버에 올 때 시애틀에서 들러서였기 때문에 공항 자체에 대한 낯설음도 덜했다.
그렇게 각종 서류들(DS-2019)과 여권을 들고 줄지어 기다리다가, 출입국 심사를 받았다. 생각보다 친절했다. 출입국 심사를 보는 직원은 UW에 가냐면서 축하한다고 말했다. 뭔가 이 지역의 좋은 학교라서 그런걸까? 쨌든 나는 학교 소관이니 그는 별다른 제재나 까다로운 인증없이 1분만에 도장을 찍어주며 나의 앞날을 축복해주었다.
짐을 찾는 것부터 약간 난항이 예상됐는데, 일단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숨을 들이마쉬고 침착하게 하기로 했다. 가장 큰 사이즈 캐리어 2개와 기내용 1개, 배낭 1개를 갖고 왔다. 큰 게 각각이 25kg씩이고, 작은 건 10kg, 배낭은 3-5kg 정도이니 못 옮길 정도는 아니지만 쉽지는 않겠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부피도 크니까. 게다가 처음 렌트비 때문에 돈이 급해서 만 불 정도를 현금을 가지고 있었던터라 뭔가 불안감이 가중되기 시작했다.
일단 그래도 짐찾는 곳 근처에서 무료 카트를 가져와서 짐을 기다리는데, 기다리자마자 짐이 2개가 연달아 나왔다. 카트에 짐을 올리느라 끙끙대니 주위 사람들이 도와줘서 매우 쉽게 짐찾기를 클리어할 수 있었다. 그리고나서 홀가분한 기분으로 터미널을 빠져나가려는데, 웬 직원들이 “웰컴투씨애틀 @!)$!)@ 너의 짐은 터미널 1에서 찾을 수 있어 그게 편할거야”라며 내 짐을 가져가려고 했다. 대충 보니까 터미널 1-2 사이가 너무 머니까, 터미널 1-2 사이를 컨베이어 벨트로 이어놓고 짐을 터미널 1로 보내주는 그런 서비스인 것 같았다. 마다할 이유가 없지. 오케이를 외치고 몸만 홀가분하게 터미널 1로 빠져나갔다.
공항을 벗어나기
한국에서 유심카드를 사고 미국 번호를 개통했기 때문에 현지에 도착하자마자 데이터를 쓸 수 있었다. 그래야 우버도 타고 그럴 테니까… 근데 뭔일인지 액티베이션이 잘 안되고, 20분 동안 끙끙대다가 두 번인가 폰을 on/off 해보니 갑자기 잘 되기 시작했다. 에어비앤비 주인은 언제 올거냐면서, 오늘 손님이 없어서 early check-in을 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다.
터미널 1의 1번 벨트에서 서둘러 짐을 찾았다. 그리고 우버를 타러 출발. 이제 시애틀 공항에는 아예 App Based Ride를 하는 곳이 지정되어 있다. Bus, Shuttle, Taxi처럼 간판에 안내까지 되어 있었다. 공항 3층쪽 주차장 구역으로 가면된다.
App Based Ride라고 아예 따로 구역이 나뉘어있다
나는 2층에 있었으므로 엘리베이터를 타고 이리저리 옮기는 도중에… 도저히 두 손으로 캐리어 3개를 끌면서 폰으로 연락하고, 눈으로 길찾는 게 무리라고 생각해서 5불짜리 카트를 꺼냈다. 그리고 그건 그 당시의 가장 현명한 판단이었던 걸로…
5불의 값어치를 톡톡히 했던…
여튼 우버 기사는 5분 정도를 기다리니 도착했고… 그는 아프리카에서 온 사람이었다. 아이들이 5명이 있고, 3개월 후에 자기 나라로 돌아갈 예정이라고 했다. 우버에서 the driver might be a d/Deaf or loss of hearing이라는 안내를 봐서일까? 묘하게 대화가 어긋난다는 느낌을 받았으나 적절히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에어비앤비까지는 30분 정도를 달렸다. 마지막에 길을 잘 못찾는 촌극이 있었지만, 어쨌든 도착을 했고, 에어비앤비 주인이 나와서 나를 맞아주었다.
구스타프의 에어비앤비
내가 열흘 정도 임시로 묵을 에어비앤비는 라벤나 파크 근처에 있다. 대략 유 디스트릭트의 북쪽으로 올라오면 되는데, 분위기를 보아하니 은퇴한 노인이나 신사들(?)이 사는 조용한 동네인 것 같았다.
이불이 매우 마음에 들어서 어디서 샀냐고 물어보고 싶을 정도이다
그 집의 위층을 본인과 아내, 그리고 매우 큰 개가 쓴다고 했다. 이 방은 그 아래층이었는데원래 2명이 묵을 수 있는 곳인 것 같았다. 싱크대, 냉장고, 식기세척기, 커피메이커까지 구비되어 있었고, 킹사이즈 침대는 매우 넓고 포근했으며, 이불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일단은 대충 짐을 풀고, 씻고 나가서 가장 먼저 은행 계좌를 만들기로 결심했다. 그때가 대략 3시 정도였으니, 4시에 나가는 것으로 생각하고.
시애틀 생활로의 모드 전환
은행 계좌 만들기
라벤나 파크에서 유디스트릭트까지는 대략 걸어서 15분 정도가 걸린다. 유딕에 있는 Bank of America에서 계좌를 만들기로 하고 출발했다. 그런데… 분명 2도라고 했는데 눈발이 심상찮게 떨어지더니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추운 날씨에 좀 당황했지만 어쩌겠나 싶어 그대로 은행으로 향했다.
은행에 도착했더니 직원이 용건을 물었고, 계좌를 열겠다고 말하니 나를 어떤 창구로 안내해줬다. 미국의 은행 업무는 약간 private banking 처럼 진행되는 부분이 있는 것 같았다. 여튼 자세한 상담을 하고, 가지고 간 서류를 모두 제출하고, 직원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 사람도 내가 UW에 교환학생 비스무리한 걸 왔다고 했다고 하니 축하한다고 말했다. 그래서 내가 그냥 1년이다, 라고 대답했는데도 그래도 UW이잖아, 라며 축하했다. 그러면서 허스키 카드를 받았니?1 라고 묻기에, 나 도착한지 몇 시간밖에 안 되었다고 답을 했다. 그랬더니 정말 내 여권을 조회해보고, 어? 너 정말 리터럴리 4시간 전에 왔구나, 라며 피곤할테니 빨리 계좌를 만들어주겠다고 했다.
어쨌든 그 직원은 매우 친절했는데, 자기가 몇 년 전에 서울에 여행갔던 이야기를 하며 본인 핸드폰에서 클럽음악을 틀어서 들려주기도 했다. 대략 30-40분 쯤 걸려서 계좌를 여는 데 성공했다. 그 후로 임시 카드를 받고, 5일 정도면 진짜 카드를 받을 수 있을 거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제일 중요한 게 check를 발행하는 것이었는데, 이게 좀 충격이었다. 사실 오기 전부터 이야기는 들었다. 현금 거래는 잘 안하고, 카드로 하거나 체크를 쓰는데… 이 체크라는 게 은행에서 내가 얼마짜리의 수표를 써달라고 하면, 그걸 받은 사람이 은행에서 그걸 돈으로 바꿀 수 있고, 그러면 내 계좌에서 나중에 그 돈이 빠져나가는… 뭔가 다소 원시적인 방법이다. 자세한 건 미국생활초보를 위한 문화이야기4Personal Check 사용법 과 미국에서 개인 수표쓰는 이유을 참고.
그냥 우리나라 같으면 이체(wire transfer)하면 될 거 같은데… 할 수 없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뭔가 요상하게 이체가 좀 자동화되지 않은 것처럼 느껴진달까. 암튼 그게 나의 스튜디오 계약에 가장 큰 장애물이었고, 나는 가져간 돈을 모두 은행에 맡기고 스튜디오 계약에 필요한 만큼의 체크를 발급받아서 은행을 벗어났다.
스튜디오 계약하기
그리고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체크를 발급받은 나는 자신감이 생겨(?) 아파트 관리인인 J에게 문자를 했다. 나 스튜디오 근처 10분 거리에 있는데, 혹시 가능하면 만날 수 있냐고. 그리고 나서 그 근처의 트레이더 조스(Trader Joe’s)에 가서 저녁 장을 보고 있었다. 간단하게 둘러보고, 우유, 요거트, 씨리얼, 냉동 볶음밥, 물을 사서 계산하려고 하는 찰나에 J로부터 연락이 왔다. 근처에 있으면 만나자고.
스튜디오 근처로 달려가서 J를 만났다. J는 나이가 50-60대 정도로 보이는 상냥하고 다정한 아주머니였다. 내가 살 아파트에 2층에 살고 있었는데, 아파트를 안내해주고 계약에 대해서 이것저것 설명해주었다. 원래는 3월에 들어가기로 했지만, 바로 다음날부터 집을 드나들 수 있도록 날짜를 조정하기로 했다. 223불 정도를 5일치 추가 렌트로 내기로 해서, 계약 자체는 내일 하기로 정하고, 아파트를 둘러보고, 빠져나왔다.
아파트는 오래됐지만, 사람들 말을 들어보면 시애틀에 50년 정도 된 아파트는 그렇게 낡은 편이 아니며(!!!), 실제로도 그 아파트는 매우 깨끗하고 조용했다. 그리고 캠퍼스, 특히 내가 다닐 Mary Gates Hall과는 거의 10분 내에 있으므로 접근성도 매우 좋은 편이다.
시간이 조금 늦은 데다가 장본 짐이 무거워 에어비앤비로 돌아갈 때는 우버를 탔다. 역시 우버가 세상 편해.
오늘이 처음인데
첫날에 너무 많은 것을 했다. 돌아와서 간단하게 샐러드와 냉동 볶음밥을 먹으며, 한국 예능을 보았다. 베이코리안즈에서 스트리밍을 할 수 있다. 아직까지는 실감이 잘 안난다. 여행자 같은 느낌. 여행자와 생활자 어디 그 중간쯤의 느낌. 마음은 단단히 먹었지만 생활이 아직 여행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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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덥 학생증. 유덥의 마스코트가 허스키라 허스키 카드라고 부르고, 유덥 사람들이 자기를 지칭할 때도 허스키라고 부르기도 하는 듯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