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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 대학원은 대학원생들에게 무엇인가?’라는 물음
Day+019 @Suzzallo Starbucks에서 쓰다.
Day+025 @Suzzallo Starbucks에서 이어서 쓰다.
Day+026 @MGH 015 Lab에서 마저 쓰다.
새삼 운이 좋았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미국에서의 생활은 한국에서의 삶과 크게 다르지 않다. 영어 외에는 대학원의 자유로운 분위기도, 교수님들과의 관계도, 연구도, 일도 크게 다르지 않다. 아마 나는 제주도에 갔어도 똑같았으리라. 좋은 것은 그냥 한국과의 거리적, 시간적 단절이다. 그 단절이 주는 ‘신경쓰이는 것들로부터의 해방’이 미국 생활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부분이다. 아마 시간이 지나면 그것이 외로움이 될 수도 있겠지만.
서울대 대학원은 대학원생들에게 무엇인가?
이 질문에 서울대 교수나 학생이 뭐라고 답할지가 궁금하다. 그리고 내게도 같은 질문을 던진다면 나는 뭐라고 이야기할까? 이 글은 내가 대학원 와서 읽었던 글 중에 가장 공감되고, 하고 싶었던 말 중에 하나를 아주 정확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명문이다 명문.
아마도 이 글을 읽었던 건 박사과정에 진학하고, 그러니까 2015년쯤이었는데. 왜인지 모르겠는데 몇몇 친구들이 페이스북에서 뒤늦게 이 글을 공유했기 때문이었다. 당시에 읽다가 소리지를 뻔했다. 그래서 고이고이 스크랩해두고, 이런 생각이 마음에 자라날 때마다 읽곤 했다.
서울대 대학원은 대학원생들에게 무엇인가? 인상깊은 구절을 몇 개 인용해본다.
대학원에 첫 발을 들여놓는 석사과정 학생들에게 제일 큰 고민은 졸업 후에도 공부를 평생의 업으로 가져갈 것이냐다. (중략) 많은 정보를 종합하여 미래를 예측해야 하는 이 골치 아픈 계산에 그 모든 과정을 거쳐 간 선배, 선배 중에서도 교단에서 가르치시는 교수님들의 진정 어린 조언은 가장 중요하다. 그런데 백이면 백 학생들이 얻게 되는 단 하나의 똑같은 답은 “유학가라”다. 외국 그중에서도 미국 대학원의 박사학위야말로 귀국 후 교수직을 보장해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곧 한국에서의 학위가 경쟁에서 밀린다는 것. 무엇이 문제일까?
차라리 그래서 선생님은 솔직한 편이었다. ‘유학 안 가도 되는 좋은 학교’를 만들고 싶다는 꿈은 다소 나이브(naive)하다고 비판 받을 여지가 여전히 있다. 사실 그건 한방에 되는 일은 아니니까. 결국 최초의 학생들은 어느 정도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다. 좋은 학교는 단번에 되지는 않을 테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 솔직한 꿈과 이상이 미국에 대한 과도한 찬양과 사대주의보다는 훨씬 낫다고 생각한다.
선생님이 이야기한 것은 융대원이 해줄 수 없는 게 ‘문화적 다양성’이라고 했는데, 그 점에 있어서는 매우 동의한다. 한국이 어디 다양성을 인정하는 나라인가? 그런 점이 부족하다는 건 확실하고, 그렇다고 하면 그 점을 보완하기 위해 미국에 가는 건 뭐, 개인에게나 사회에나 좋은 일일 것이다. 하지만 많은 경우 ‘그런 이유’로 미국행을 권유하진 않는다. 그러니까 나같은 사례는 주위에서도 보기가 힘들다. 여기 나올 때도 “그럴 거면 포닥을 가거나 유학을 가지 왜?”라는 말을 정말 많이 들었다. 그런 질문이 전제하는 건 보통 아래와 같은 이유이다.
심하게 말하면 무조건 유학가라는 조언은 진심 어린 조언이라도 직무 유기이다. 왜냐면 학생에게 그러한 조언은 “우리 대학원은 훌륭한 학위자를 배출할 능력이 없으므로 우리 학교 학위자를 우리는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로 들릴 수밖에 없다. 왜 한국의 대학원은 강력한 박사 프로그램을 만들고 인재를 육성하는 일을 포기했는가? 왜 그것을 외국 학교에 일임했는가? 무수한 유학생을 배출하는 서울대는 유학원인가? 특히 서울대는 미국 대학원 입시학원인가?
2013년에 쓰인 글이다. 지금의 상황과 다른가? 아니 다르지 않다. 뭐 달라진 것이 있다면 너도나도 유학을 가다보니 유학생들 사이의 경쟁도 심해져서 메리트가 과거보다 크지 않은 정도일까? 물론 유학이나 미국/외국행이 주는 장점은 분명히 있다. 모든 것이 새로운 것에서, 새로운 문제를 보고, 다른 눈을 가지게 되고, 다른 방식을 배우게 되고… 그 모든 다양한 경험들은 분명히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을 확장해준다. 네트워크가 확장되는 것도 물론이다. 영어도 좀 더 나아지겠지. 하지만 그것만이 학위의 전부인가? 해외에서 학위를 따면 그것이 서울대의 그것보다 무조건 우수한가? 그렇다고 인정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진짜로 문제다.
‘미국에서는 말이야’로 시작하는 미국병
이 이야기를 오늘 완전히 다 쓸 수 있는지 모르겠지만… 아무튼 뭐 결국 또 운이 좋다는 말로밖에 시작할 수 없겠지. 어쨌든 내가 보고 들은 미국, 그러니까 UW에서의 대학원 생활은 융대원의 대학원 생활과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인다.
그렇다면 나는 미국에 왜 왔는가? 사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하도 미국병 걸린 사람들이 많아서(내 주위에도 일부 있고)… 그러니까 내가 시애틀에 오게 된 이유 중 하나가 ‘그놈의 미국, 내가 가보고 얘기해주마!’라는 일종의 반발심도 있었다는 건 아마 친한 사람들은 알 것이다. 왜냐면 미국에 다녀온 적도 없으면서, “여기(한국)도 마찬가지야!”라고 말하는 건 굉장한 정신승리처럼 보이거든. 억울해도 할 말은 없다. 왜냐면 스스로 검증한 적이 없기 때문에.
여튼 그놈의 미국 찬양주의자들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을 지경인데… 미국병이라는 걸 찾아보니까 심지어 그래도 정의가 있네. 물론 내가 말하는 미국병은 이 정도는 아니고. 그냥 내가 느끼기에 미국에 과도하게 열광하고, 모든 측면에서 한국과 미국을 비교한 후, 미국을 찬양하는 그런 증상이 있는 사람들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뭐 증상의 정도에 차이는 있겠으나… 대체로 이런 식의 표현이 동반된다.
“아~ 미국에서는 안 그러는데~”
“내가 미국에 있을 때는~”
“미국에서는 어떻게 하냐면~”
그리고 왜 그래야 하는지 모르겠는데 꼭 한국과 미국을 비교한 다음에 “미국 것이 최고시다”라는 일견 사대주의로 연결이 되는 것이다. 근데 그게 꼭 필요한 일인지 그걸 잘 모르겠단 말이지. 뭐가 좋냐고 물어보면 그냥 다 좋다는 것이다. 미국은 안 그러기 때문에 혹은 미국은 그러기 때문에. 뭔가 논리적인 이유는 없는 것 같은데, 그냥 좋다는 것이다.
문제는 때로는 그 힘이 너무 과도해서, 밀려나게 된다는 것이고, 더 큰 문제는 그러면 그렇게 좋은 점을 잘 내재화해서, 어떻게 바꾸면 좋을지 생각을 해봐도 좋지 않을까? 굳이 공격적 언어로 모든 면에서 미국은 최고고 한국이 열등하다는 생각을 계속해서 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사실 그러한 생각의 가장 큰 피해자가 자신이었음을 잊게 되는 것이니까, 어쩌면 당연한 합리화인지도 모른다.
보통 그런 생각은 한국에 있을 때 너무나 구조적인 부조리를 맞닥뜨리거나 힘든 상황에 있게 되면 자라나게 될 것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하고 발버둥쳐도 벗어날 수 없는 거대한 압력과 힘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될 때, 사람들은 무기력해진다. 그 환경과 구조를 탓할 수밖에 없는데, ‘남탓’하는 것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일종의 혼란도 느낀다. 이게 정말 환경과 구조의 문제인지, 아니면 내 문제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그러다가 남탓을 하게 되는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는 것인데, 너무나 뛰어나고 똑똑한 사람들일수록 그건 견디기가 힘들다.
그런데 그들에게 미국은 어떠한가? 미국에 오게 되면, 어쨌든 한국에서조차 부조리한 환경을 벗어나게 되는 것이므로, 어쨌든 심적으로 훨씬 안정적인 상태가 된다. 그때가 되면 그리고 자기 혐오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진짜로 객관적으로 그 상황과 구조가 나빴던 것이다. 그렇게 미국과 선이 동일시되고, 한국과 악이 짝지어진다. 내가 봤을 때는 그게 미국병 바이러스의 시작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놈의 미국병은 매우 위험하다. 왜냐하면 결국 유학을 다녀와서 자신이 원하는 소기의 성과를 이루고 나면, 그 구조의 불합리를 벗어나는 유일한 길이 유학이기 때문이다. 자신이 그 악을 깨부수지 못한 것은 그것이 절대로 바뀔 수 없기 때문이지, 용기가 없었거나 노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다. 따라서 유학을 가는 것이 자신이 했던 최고의 방법이라는 것은 절대적인 진리가 되어야만 한다. 이러한 순환이 무서운 이유는, 자기 자신들도 그 부조리의 재생산에 일조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내가 운이 좋다고 계속 이야기하는 것도, 결국 내가 그러한 구조적 불합리를 적어도 서울대, 서울대 대학원(융대원)에서 전혀 경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대학원에서의 노동 착취, 억압적인 구조, 교수의 사노예화, 성추행 관련 등의 문제를 어쨌든 나는 겪지 않았다. 그러므로 나는 패배감도 느낄 필요가 없으며, 부조리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필요가 없었다. 오히려 융대원은 그런 면에서는 적어도 나에게는 좋은 학교에 가까웠다.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운칠기삼(運七技三)이 아니라 운구운일(運九運一)이라고. 그냥 운이 전부라고. 그래, 틀린 말이 아니다. 맞는 말이다. 절실히 느낀다. 많은 것들이 행운처럼 온다. 불행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다르게 만드는가: 한국 대학원 vs. 미국 대학원
무엇이 한국과 미국을 다르게 만들까? 여기 와서 만난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에게 항상 두 가지의 질문을 했다. 어쨌든 나는 연구하는 사람이니 궁금증을 풀어야만 했다. 연구문제는 “사람들은 한국 대학원과 미국 대학원의 차이를 어떻게 인식하고 있는가?”라고 하자. 그리고 연구방법으로는 일종의 반구조화 인터뷰(semi-structured in-depth interveiw)와 관찰(observation)을 했다고 해도 괜찮겠다. 그래도 한 8명(K, C, R, J1, B, M, N, J2) 정도는 만나서 이야기를 했던 것 같고, 30일 정도 관찰했더니, 다음과 같은 소결론을 내릴 수가 있었다.
수평적 구조와 자유에 대한 믿음
많은 사람들이 가장 많이 이야기했던 부분이다. 대부분의 경우 한국의 대학원은 미디어에서 보거나 경험담으로 들어도, 어쨌든 한국사회의 경직성을 피할 수 없는 구조라고 본다. 그리고 내가 봐도 어느 정도 사실이기도 하고. 미국에서의 장점 중 하나는 일단 ‘교수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이름을 부르는, 언어가 주는 수평적인 관계가 크다. 맘대로 부르고, 그럼으로써 ‘나는 의견이 달라’라는 말을 당당하게 할 수 있는 것. 그리고 여기의 학생들은 그런 말을 해도 불이익이 없을 것이라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사실 이런 부분은 나에게는 크게 와닿지가 않는 것이, 일단 융대원, 적어도 디융과에서는 나도 꽤나 수평적 구조에서 있었기 때문이다. 교수님들에게 대부분 선생님이라고 부를 수가 있었는데, 그게 도움이 많이 되었다. 나는 틈만나면 선생님들하고 맞먹기도 하고(?) 이렇게 저렇게 재밌게 지냈다. 어쨌든 적어도 융대원 디융과에서 나를 억압하며 강압적으로 뭔가를 시키는 듯한 느낌은 4.5년간 받지 못했으니.
그건 사실은 또 운이 따랐던 것인데, 어찌되었든, 그 시기에 일할 사람이 많지 않아 나와 C 오빠는 묶여서 여러 교수들과 이런저런 일을 할 기회가 많았고, 그게 또 나한테는 기회였다. 어찌되었든 교수들은 학과를 위해서 일하는(=제안서 쓰는) 학생들을 나쁘게 볼 이유는 없고, 그럭저럭 일도 (잘했는지는 모르겠지만) 끝까지 마무리 짓기는 했으니… 그때의 인연들을 토대로 많은 선생님들에게 가는 장벽을 많이 허물 수 있었던 것 같다.
게다가 뭐 가장 크게는 우리 연구실이다. 선생님하고 오래 일을 해서 그런 것도 있겠지만, 어쨌든 연구실에서 나는 선생님의 가장 큰 안티테제(antithesis)에 가까운 존재였다. 가치관, 연구접근, 방법 등 대부분의 관점에서 정반대의 입장을 취하는 나는 항상 “흠… 저는 의견이 좀 다른데요” “그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요” 등의 말을 달고 살았고, 한 후배는 그렇게 다른 둘이서 맨날 말싸움 같은 토의를 하는 게 흥미진진하다는 코멘트까지 했다. 물론 연구실 안에서도 가끔 내가 심했나 돌아볼 때도 있었지만, 종종 연구실을 벗어난 외부에 나가서 교수-제자들의 관계를 보면 그러한 다소 파격적인(=개기는?) 관계는 한국 대학원에서는 허용되지 않는 부분도 있었으니. 몇 년 전에 해외 학회에 간 적이 있었는데, 어찌저찌 이야기하다가 내가 장난스럽게 “아, 저희 교수님은 원래 그러세요”라고 웃으며 말했더니, 어떤 다른 교수님 연구실의 포닥이었던가 하는 사람이 “아니, 어디 교수님께 감히!(그런 말을 하나요?)”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이런 식의 관계는 필연적으로 자유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한국에서 대학원생이 어쨌든 교수의 사노예가 되는 일의 원인은 수직적 관계일 것이다. 상명하복의 그 문화, 까라면 까야하는 그 문화가 어떻게 사람을 변칙적으로 부리는 것과 연관이 없을까? 하여튼 그러나 나는 일단 뭐 그런 사람이 나의 지도교수가 아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그냥 내가 언제든 박사를 관둘 수도 있는 그런 절실함이 없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강압적으로 까라고 해서 깐 일은 없었던 것 같다. 게다가 우리 연구실은 아주 타이트한 출퇴근 시간도 없고, 나도 연차가 쌓이면서 PM을 자주 하다보니 시간을 관리하는 데 여유가 생기니 자유가 따라온 것도 사실이다.
주로 내가 바빴던 것은 연구와 프로젝트와 연구실 일들 때문인데, 그건 내 욕심 탓에 계속한 부분도 있다. 결국 나는 내게 오는 기회의 대부분을 잡고 놓치지 않으려고 했고, 그러려면 시간이 부족하니까… 지금은 보기 어려운 선배 S는 나에게 한때 그런 이야기를 했다. “너 예스걸(yes girl)이잖아. 그렇게 들어오는 걸 하나도 거절하지 않으니까 자꾸 일이 오는 거지.” 그 말은 정말로 사실이었고, 언제든지 나는 거절할 수도 있었는데. 어쨌든 졸업도 해야하고, 나는 잘하는 학생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하나라도 놓치고 싶지가 않았다. 그래도 뭐 박사 2년차부터는 정말 싫은 것들은 웬만하면 안하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던 것 같고. 그건 머리가 그냥 커져서 그런가? 하지만 머리가 커질수록 졸업이 아쉬우니가 그런 말을 못하는 사람들도 있는 걸 보면, 꼭 연차가 쌓이는 것에 대한 문제는 아닌 것 같다. 여튼 뭐 우리 연구실은 그냥 일을 잘 하면 어느 정도 자유가 보장된다. 책임도 따르지만. 그게 미국식인 것 같기도 하고. 물론 어떤 학생들에게는 전혀 그렇게 느껴지지 않을 수 있다. 그치만 나는 그랬다는 것이다. 어차피 이건 케이스 스터디다. 비교 대상은 아주 특수하고 극한(extreme case) 내 경험에 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미국은 학생-교수가 철저한 비즈니스 관계다. 여기는 자유도 있지만, 결국 보면 자기 욕심이 있는 학생들은 집에서든, 연구실에서든, 어디에서든 일한다. 그러니까 뭐 바쁘고 말고는 그냥 자기가 결정하는 것이다. 근데 때로는 교수들이 학생이 부족하니까 한두 학생에게 일을 몰아주기도 하고… 보면 여기도 그냥 내가 겪은 것과 크게 다르지가 않다. 그리고 이런 말은 좀 뭐하지만, 들어보면 결국 밤낮으로 학교에 나오고, 주말에 나와보면 다 아시안 학생들이라고. 영어 부족하고, 열심히 하는 것이 익숙한 아시안 학생들은 그 정도만 일해도 한국보다 적게 일하는 것이기 때문에 웬일인지 결국 열심히 하는 식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연구 로드만 놓고 보면 한국-미국은 크게 다르지 않은데, 그놈의 잡무, 교수가 시키는 각종 잡다한 일들 때문에 문제가 되는 것이다. 결국 한국과 미국의 대부분의 차이는 교수-학생의 전통적이고 억압적인 관계에서 오는 것이며, 그러므로 그런 구조가 깨어지지 않는 이상 문제 해결은 요원하다.
그런 면에서 나는 비-억압적이고, 비-수직적인, 조금은 특이한 한국 대학원의 어느 연구실 학생으로서 별로 부족함 없이 유달리 잘 지냈던 것이다. 그러니 미국에 와서 제일 좋은 점이 수평적인 구조와 자유라고 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할 수밖에. “음? 나는 한국에서도 그랬는데?” 하지만 이 점에 대해서는 내가 아주 예외적인 사례였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다만, 한국에서도 불가능하지는 않다고. 그냥 그 얘기가 하고 싶은 것이다.
다양성과 협업의 존중
내가 가장 다르다고 느낀 건 이 부분이다. 존중의 개념이 아카데미아 전반에 적용되는 것 같다는 느낌. 남을 존중하니까 열려있는(open) 건 어찌보면 당연한걸까? 특히 시애틀은 다양성(diversity)에 대해서는 아주 병적인(?) 집착을 보이고 있기 때문에 UW은 더욱 그런걸지도 모른다. 유학 준비하던 (그래서 지금은 합격한) H 말로는 지난해에 유학 어플라이하는데, 다양성과 자기 연구 주제, 경험을 연결시켜보라고 해서 너무 당황했다고 했다. 미국 사회에서는 다양성이 큰 이슈 중에 하나이고, 그래서 CHI 2016도 CHI4Good이라는 다양성과 관련된 토픽이 주를 이뤘고, 뭐… 미투도 한참 전에 나왔고, 트럼프의 당선으로 대중에게 내재된 차별에 대한 공포가 아카데미아에도 큰 문제로 다가오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여튼 UW은 대학 홈페이지에 버젓이 다양성을 내세우고 있고, 여기 대학가를 걸어다니면 여기가 아시아인지 미국인지 구분하기 힘들 정도로 아시안도 많다. H언니는 “적어도 네가 시애틀에 있는 동안에는 인종 차별을 당할 일은 없을거야”라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이렇게 다양성에 대한 집착은 아카데미아에서도 이어지는 듯하다. 교수-학생-학과를 넘나드는 협업이 잘 이뤄진다. 거기서 작동하는 것이 다양한 교수들이 속한 연구실(lab)이라는 개념. 여기의 연구실(lab)은 개념이 좀 다르다. 우리는 교수=랩인 반면, 여기는 적어도 그렇지 않다. 랩은 약간 공간적 구분인 셈인데, 연구실 n개와 그 교수들의 학생 n x a명이 하나의 랩을 공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는 “A랩입니다”라고 해도, 지도교수는 누구인지 명확하게 특정되지가 않는 것이다. 왜냐하면 그 랩에는 x, y, z 교수가 있으므로, 그 셋 중 한 명이 지도교수일 수는 있지만 누군지는 알 수 없지. 이게 장점이 되는 건 A랩에 있으면서, x, y, z 교수를 매일매일 오며가며 만날 수 있는 것이고, 지도교수가 다른 학생들끼리도 서로 교류하면서 연구를 진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무 교수나 찾아갈 수도 있고, 어떤 교수가 다른 학생을 쓸 수도 있다.
그러니까 여기에는 그 유명한 파벌 같은 게 한국 만큼 심하지는 않다. 물론 여기도 내가 모르는 뭔가가 있겠지만… 한국에서는 이상하게 쓸데없이 서로 연구실을 견제하는 느낌이 강하다. 솔직히 우리 학교 내에서 HCI하는 그룹 사이에서 나타나는 그 이상하고 묘한 견제를 나는 견디기가 힘들다. 좀 도와서 서로 연구할 수도 있는 게 아닌가? 그러려면 먼저 서로를 알아야하고? 근데 그냥 서로 자기 연구실 면 세우느라 바쁘다. 그러니 카이스트가 풀페이퍼 19편 낼 때 서울대에서 겨우겨우 짜내서 2편 내는 것이 아닌가? 그마저도 각자도생이다. 물론 강박적으로 서로 연구를 이어서 할 필요는 없지만, 할 수도 있는데 못하는 것은 좀 다른 이야기지. 지금 내부적으로 연구실 체면을 세울 때가 아니라 학교 체면부터 세워야 하는 게 아닌가… 싶은데, 그게 포기가 안 되는 거겠지. 이해는 간다. 나라도 그럴 것 같긴한데…
게다가 여기는 얼마나 또 엔지니어가 아닌 사람들을 말 그대로 무시하는 풍토가 강한지. 내가 정말 앱이로드 안하면서 코딩을 아예 몰랐다면 진심 서러웠을 것이다. 예전에 나의 절친한 친구(?)가 썼던 일기와 같은 편지에서 가장 심금을 울렸던 구절을 인용한다.
그전에는 다른 어떤 곳에서 단한번도 들어본적이 없는, ‘문과출신’ 이라는 꼬리표. 융합이라는 학문을 하라고 만든 곳에서 이런 시선은 특히나 더더욱 폭력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우리 연구실의 70% 정도는 엔지니어링 스킬이 없기 때문에 이런 설움은 없었지만, 다른 연구실은 대부분 그렇지 않다. 그리고 모두가 그렇진 않지만 일부 공대 출신 학생들의 그 폭력적이까지 한 자부심이 정말 짜증난다. 논문 한 편도 제대로 쓸 능력이 없으면서 단지 코딩, 그러니까 마치 영어나 운전과 같이 하나의 스킬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문과는 안돼”라는 식으로 이야기를 하거나, “벡터가 뭔줄은 알아?”라고 이야기하는 것. 그리고 그런 것들을 묵인하는 구조적 폭력.
어쨌든 나는 그런 문제의 한가운데에 있지 않으니 뭐라 할 말은 없지만. 한때는 다른 연구실, 공대 출신 K가 우리 연구실에 자주 와서 저런 식의 이야기를 하며 패악을 부리던 때가 있었다. 나는 참지 못하겠어서 “그러면 우리 교수님한테 가서 그렇게 얘기하세요”라고 딱 잘라 말했다. 그 이후로 K는 내 앞에서는 딱히 뭐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교수님들이 메일만 보내면 정말 30초 내로 답장이 오지. 하지만 나도 몇몇 귀가 있으니… K가 그 연구실에 신입생들이나 지원자들이 온 자리에서 우리 연구실을 ‘코딩도 못하는, 포스트잇이나 들고다니는 랩’이라고 싸잡아 폄하하는 것도 안다. 다만, 놔둘 뿐이다. 어쨌든 그 사람은 그 사람의 지도교수의 몫이지. 그래도 짜증나는 건 짜증나는 거다. 그런 인성이 문제가 있는 학생, 거기에 논문 퍼포먼스도 없는 학생을 유지하는 게 어쨌든 학과 차원에서도 나쁜 거 아닌가? 결국 그런 식의 생각을 신입생이나 지원자들에게 전달하는 게 제 얼굴에 침뱉기가 아니고 무엇인지? 알고도 놔두는건지 몰라서 그러는건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융대원의 문제는 그런 식의 ‘다양성’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그럴 노력도, 그럴 의지도 없어 보인다는 게 가장 큰 문제겠지.
좋은 연구 그 자체에 대한 추구
두 번째와 비슷한 맥락일 수도 있는데, 어쨌든 여기 대학원에는 대체로 ‘연구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많다. 미국의 좋은 대학은 경쟁이 심해서인지, 경쟁력 있으면서도 연구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다보니 시너지도 나고, 서로 굉장히 협력적으로 행동한다.
일례로 학위논문 심사(dissertation proposal)를 구경하러 갔는데… 뭔가 한국과 달랐다, 분위기 자체가. 학생이 프로포절 발표하는 것도 물론 격식이 없지는 않지만, 정말 그 연구를 ‘사랑한다’는 느낌이 강했고. 그랬기 때문인지 교수들도 정말로 ‘진심으로’ 그 연구가 잘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굉장히 건설적인 코멘트를 주는 광경이 매우 인상깊었다. 한국에서 본 많은 경우, 교수들이 학생을 깔아뭉개야 한다(?)는 마인드가 있어서인지 굳이 안해도 될 말을 한다든지, 뭔가 “진짜 망신이라도 주려고 저러나?”라는 느낌이 들만큼 호되게 크리틱을 하기도 하는데… 뭔가 그런 마인드가 너(학생)와 나(교수)의 수준 차이를 가시화하려는 그런 생각에서 나온건지 어쩐건지 모르겠지만.
여튼 여기서는 적어도 그 학생을 한 명의 독립된 연구자로 간주하고, 무슨 생각이 어떻게 되면 좋은지, 무엇이 빠졌는지, 그걸 생각해본 적이 있는지, 어쨌든 존중의 문화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데 그게 여기에 맞기는 하지만 한국에서 가능한 정서인지는 잘 모르겠다. 존중해주면 정말 좋은 학생이라면 스스로 생각해보겠지만, 또 아니라면 그대로 안주해버릴지도 모르니까. 어쩌면 경쟁력 있는 동료가 옆에 없어서 그런지도 모른다. 경쟁력있는 동료는 다 미국에 있거든. 그러니까 교수들 입장도 이해는 간다. 얘가 잘못 생각하거나 뭘 못하고 있는데, 존중하면서 좋은 말로 하면, 다른 경쟁력있는 후보가 없는 상황에서 우쭐해질지도 모르니까. 그래도 뭐 잘 모르겠다 여기에 대해서는… 전반적인 구조의 문제인가? 문화의 문제인가?
언제나 양면이 있다
유학간지 몇 년쯤 되었나? 학부 때 친구가 있다. 아주 좋은 학교에 입학하여 무척이나 축하했던 기억이 나는데… 페이스북에 그제쯤 이런 표현을 담은 포스팅이 올라왔다.
알면 알아갈수록, 이 나라(미국)에 대한 존경심은 갈수록 줄어든다. 이 곳에 와서 이 나라의 훌륭함에 경도되는 사람들의 사고 단계가 궁금해지는 요즘이다.
경험을 객관화하다보면, 결국 이 단계에 종착하게 되는 게 아닐까? 훌륭함이 있는 것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도 있을 것이고. 미국에 정착해서 살고자 한다면 훌륭함에 경도되는 건 어쩌면 좋은 전략이겠으나. 어쨌든 미국도 완전한 천국은 아니고, 엄청난 경쟁과, 특히 자본주의가 침투되어 있는 곳이므로. 아카데미아도 결국 돈의 논리이다. 돈되는 학문은 학생도 많고, 취직도 잘되고, 교수 자리도 많다. 여기도 그놈의 펀드가 언제나 문제다. 교수들이 하루에 수백통의 메일을 받지만, 결국 가장 먼저 답장하는 것은 펀드에 대한 메일이다. 너무도 당연하지 않은가? 그러니까 여기도 명과 암이 있는 것은 너무 당연하다. 어떤 것이 좋다고 느끼면 어떤 것은 나쁘다고 느낄 수밖에.
몇몇 사람들에게는 내가 느낀 한국과 다른 미국을 설명하다가, 오히려 미국이 그렇게 좋은 나라만은 아니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나: 여기 와서 조금 다르다고 느낀건요. 어떤 학생 dissertation proposal에 갔는데, 교수들이 굉장히 호의적으로, 뭐랄까 그 연구를 비판이나 비난하려고 하는 게 아니라, 정말로 도움을 주고, 좋은 연구가 되었으면 좋겠다는 느낌으로 코멘트를 한다고 할까요.
A: 그건 (UW이) 좋은 학교라서 그래요. UW이 그래도 나름대로 좋은 학교라서. 미국이라고 다 그런 건 아녜요.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얼마나 많은데.
결국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얼마나 객관화할 수 있느냐다. 물론 언제나 그렇듯이 객관화는 행복에는 별 도움이 안 된다. 그냥 미국의 훌륭함에 경도되든지, 한국에서 사는 게 최고야라고 정신승리하든지 뭐가 되었든지, 하나를 선택하는 게 정신건강에는 좋을 텐데. 평생 그렇게 하지를 못했으니 뭐, 지금도 이런 글을 쓰고 있는 게 아닐까. 여튼 뭐… 한 6개월 지나면 또 생각이 달라질지도 모른다. 일단 지금까지의 생각은 이러하다는 것을 적어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