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월의 소회



한국은 설날을 맞았고, 어느덧 돌아갈 날이 멀지 않아서 조금씩 정리하는 소회. 몇 가지가 있는데 생각나는 것부터 차근히 적어보기로 한다. 돌이켜보니 확실히 가시적 성과보다는 혼자서만 느낄 수 있는 내적 성장이 훨씬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 같고. 1년 전 떠날 때 여섯 분의 교수님께 메일을 썼다. 잘 다녀오겠노라고, 좋은 학생이 되도록 노력하겠다고. 한 교수님이 보내주신 답장의 한 구절이 아직도 머릿속에 맴돌아 다시 한 번 들춰보았다. “짧은 기간이라 운이 많은 부분을 좌지우지 할 수 있으니, 노력은 하되 특별히 되는 일이 없어도 좌절하지 마세요. 이런 경험은 한 10-20년이 지나야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습니다.”

#1: 1년은 긴가 짧은가?

오늘 시애틀에는 눈이 내렸다. 시애틀에는 눈이 자주 내리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한껏 들뜬 모양이다. 학교는 문을 닫고 여러 회사들도 재택근무를 권장한다고 했다. 하지만 내가 시애틀에 도착한 첫 날, 그러니까 작년 2월의 마지막날 즈음에도 눈이 내렸는데.

그리고 이제 다시 2월이 되었다. 그러니까 여기에 온 지 딱 11개월이 지났다는 뜻이다. 이제 유난히 다른 달보다 짧은 2월이 지나면 꼬박 1년을 채우게 되는 셈이다. 그리고 그레이스 피리어드까지 싹싹 다 끌어모아도 4월 중순에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한다. 꼭 트럼프 때문이 아니더라도, 어쨌든 외국인으로서 이곳의 학생이 아닌 신분으로 더 머물기는 어려울테다. 애초에 비자를 발급해주던 이 나라와 내가 했던 약속은 ‘정해진 기간이 끝나면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것’이었으니까.

1년이 너무 짧다거나 길다고 생각해본 적은 없었는데. 지난 11월부터 이런저런 일들로 바쁘게 지내면서 비로소 약간 익숙해졌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메리카노 커피를 주문하고 “Room?”이라는 질문을 받았을 때 어떻게 답해야할지 몰라 우왕좌왕하던 첫 날. 온스와 파운드, 인치와 피트, 마일, 파렌하이트와 같은 낯선 단위를 단번에 연산하지 못하던 순간. 아파트 앞에서 시큼한 대마초 냄새를 맡았을 때의 생경함. 계좌이체가 아닌 종이로 된 체크로 월세를 내는 경험. 대중교통 피크시간이 3-5시라는 걸 알게 되었던 버스정류장의 기억. 거리에서 누군가 총을 쐈다는 소식을 이메일로 받던 순간. 그 모든 낯선 것들이 이제 약간은 당연해지는 시점에 떠나야 함을 기억한다. 도착한 날 들었던 J비자 스페셜리스트의 이야기와 함께. “아마 당신이 미국에서 겪는 낯선 문화에 익숙해졌다고 느끼게 되는 때가 온다면, 그때가 당신이 이곳을 떠나야하는 시간이 될 거예요.”

#2. 유학생도 박사초년차도 아닌 그 중간 어딘가에서

작년 초중반부까지는 혼란스러운 시간이 계속되었다. 잘하고 있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도 같고. 영어가 문제인 것 같지만 그런 것 같지 않기도 하고. 나는 이곳에 속한 사람도 아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아니고. 외로운 것 같지만 그렇지 않았던 것 같기도 하고. 눈물이 날 것 같은 순간들이 있다가도 갑자기 웃음으로 가득찬 날도 있었다. 어떤 날은 종일 무엇도 하지 않고 멍하니 앉아있었고, 또 어떤 날은 단 1분도 쉬지 않고 잠도 자지 않은 채로 책상 앞에 앉아 빈 문서들을 채워나갔다. 이게 박사과정 중에 겪는 당연하고도 지독한 우울인건지, 아니면 타지 생활 중 나타나는 통상적인 부적응의 증거인지, 그도 아니면 그냥 ‘나’라는 개인의 능력 부족 탓인지 분간하기 어려운 나날들이 지속되었다.

문화가 다르고 일하는 방식이 다르고 언어가 다르다는 점은 소규모의 시행착오를 불러일으켰다. 하나하나는 별 일이 아니었지만 작은 좌절들이 알게 모르게 쌓여갔다. 사람들은 거리의 문제를 내재화하고 있었고, 그래서 컨퍼런스 콜이 자연스러웠다. 슬라이드는 적합한 자료 공유의 양식이 아니었다. 지나고 나서야 깨달았다. 그냥 문서로 정리해서 공유하는 게 나았네. 토의를 하다가 예전에 프로젝트에서 했던 자료를 그 자리에서 같이 보려고 했으나 한국어 문서였기 때문에 어물쩡 넘어갈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많이 없었고 사실 그만큼 중요한 문제가 아니었으니까. 근데 그러면 내가 이걸 공유하고 싶으면 예전에 했던 자료를 다 영어로 미리 바꿔와야하는 거구나. 무슨 미팅을 준비하든 시간이 배로 걸렸다. 그밖의 자잘한 문제를 전부 늘어놓자면 끝도 없을 것이다.

사람들은 그게 유학 나온 첫 해 혹은 박사과정 1-2년차에 겪는 자연스러운 문제라고 설명해주었다. 그리고 노력이 동반된다는 전제 하에 시간이 해결해주는 바가 있다고. 다소간 위로가 되었지만 한편으로는 여전히 혼란스러웠는데 두 가지 이유 때문이었다. 일단 나는 유학생이 아니며 박사 1-2년차도 아닌데. 유학생이 아니라는 점은 어쨌든 나에게는 문제를 해결할 시간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고. 박사 초년차가 아닌데 같은 문제를 겪는다는 점은 그동안 해왔던 노력이 사실은 별 의미가 없다는 신호 같아 초라해졌다. 여기의 박사 3-4년차 친구들은 한 해에도 몇 개씩 좋은 저널과 컨퍼런스에 논문을 내는데, 나는 같은 차년도에 박사 1년차에 겪는 문제들을 겪고 있다니 맥이 빠졌다.

영어 시험 점수와는 다른 현실 영어도 우울함을 부추겼음은 당연지사다. 안 들려도 너무 안 들리고, 말이 안 나와도 너무 안 나왔다. 첫날 아이메드 미팅에 갈 때는 자기소개를 시킬 것 같아서 1분짜리 소개를 써서 집에서 달달 외우고 갔다. 막상 가니까 너무 떨려서 외운대로 제대로 이야기하지도 못했지만.

여기서 만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닌 사람들조차도 모두 유창하게 보여서 어쩐지 더욱 희망을 가지기가 어려웠다. 좌절한 나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는 위로는 대부분 비슷했는데. 노력을 한다는 전제 하에 어쨌든 시간이 해결해주는 바가 크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때의 나는 ‘시간이 흐르기 전’의 나였기 때문에 좌절감이 더 컸고 시간의 힘에 대해 회의적이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정말 조금은 달라진 지점이 있었는데, 그건 영어력(?) 자체라기보다는 그걸 대하는 나의 마음가짐이었다. 솔직히 영어 실력 자체는 아주 눈꼽만큼 늘었을까? 그치만 좀 달라진 건 마음 그 자체다. 그 전에는 뭔가 절대로 더 나아지지 않을 것 같았는데 그건 아니었다. 지금은 아닌데 나중에는 좀 더 나아질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희망을 갖게 되었다. 여전히 나의 생각만큼 시원하게 말이 나오지 않고, 시간이 오래 걸리며, 마음 한구석이 불편한 감이 있지만. 이제는 약간 체념(?)의 단계에 이르렀기 때문인지 그냥 받아들이기로 했다. 필요하다면 시간을 들여서 설명할 수도 있겠지. 그게 정말 필요한 것이라면. 여전히 처음보는 여러 사람 앞에서 술술 말하기는 어렵지만, 다소간 긴장하지만 (실제로 땀이 난다) 그냥 눈 딱감고 한다. 실력의 향상과 달리 마음의 변화는 가시적이지 않지만, 그래도 나 혼자만 아는 발전도 어쨌든 성과라고 할 수 있겠지.


#3.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 한국에서
#4. 정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 미국에서
#5. 나의 결대로 사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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